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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을 위한 것이라고? ‘외국어·외래어 남발’ 정책 용어 - 정채린 기자

by 한글문화연대 2023. 10. 23.

시민을 위한 것이라고? ‘외국어·외래어 남발’ 정책 용어

개선 시 연간 3,375억 원의 경제적 비용 절감

 

 

한글문화연대 10기 정채린 기자

jcr7710@naver.com

 

 

10월은 한글날(9일)이 있는 의미 있는 달, 언제나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우리만의 글자가 생긴 달이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면 한글보다는 로마자와 같은 외국 글자가 많다. 심지어는 공공기관에서 사용하는 언어까지도.

 

 
 

 

이 중에 시민들이 검색 없이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는 용어는 얼마나 될까. ‘비치코밍’은 해변(beach)을 빗질(combing)하듯이 조개껍데기, 유리 조각 따위의 표류물이나 쓰레기를 주워 모으는 것을 뜻한다. ‘BRT’는 도심과 외곽을 잇는 주요한 간선도로에 버스전용차로를 설치하여 급행버스를 운행하게 하는 대중교통시스템을 말한다. 요금정보시스템과 승강장·환승정거장·환승터미널·정보체계 등 지하철도의 시스템을 버스운행에 적용한 것으로 ‘bus rapid transit'을 줄여서 ‘BRT’라고 부른다. ‘북트레일러’는 새롭게 출간된 책을 소개하는 동영상으로, 영화의 예고편을 가리켜 영화 트레일러라고 하는 것에서 따온 용어다. 모두 처음 들을 때는 긴가민가하지만, 설명을 들으면 쉽게 이해된다. 하지만 설명 없이 바로 이해할 수 있게, 세 용어를 해변 정화, 간선 급행 버스, 책 예고편이라는 쉬운 우리말로 썼다면 어땠을까?

 

공주대 교수 등 연구진이 2020년 발표한 '행정기관 보도 자료의 어휘 및 외국 문자 사용 실태 조사'에 따르면, 한 광역자치단체의 보도자료 1,161건을 분석한 결과, 대체어(순화어)가 있는데도 어려운 한자어와 외래어가 쓰이거나 사전에도 올라와 있지 않은 임시 조어가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 문자가 직접 노출된 빈도는 4,560회에 이르렀고, 월 평균 27.5%의 보도자료에서 소통을 어렵게 하는 어려운 낱말이 사용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공언어에서 주로 보이는 국한문체와 영문의 혼용, 어려운 한자어의 남용 그리고 과도한 약어나 유행어의 사용 등은 한글문화를 어지럽히는 대표적 유형들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2021년 국어문화원연합회의 의뢰를 받아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공공 언어에서 가장 개선이 필요한 항목으로 ‘낯선 한자어 등 어려운 단어'라는 답변이 63%로 가장 높았다. 이어 ‘외국어 및 외래어'와 ‘복잡하고 길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각각 37.6%, 37.5%로 비슷하게 나타났다. 또 어려운 공공 언어로 인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9점 척도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답답하고 불편함'이 6.0점이고 ‘피로감을 느낌' 5.9점, ‘당혹스러움' 5.7점, ‘위축됨' 5.4점, ‘불안하고 상실감을 느낌' 4.8점,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음' 4.4점 등이었다. 9점이 ‘매우 심하게 느낌'이고, 5점이 ‘보통'이었으니, 대체로 보통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셈이다.

 

대체할 수 있는 용어가 없었던 걸까?

같은 해 경기도가 실시한 ‘공공언어 바르게 쓰기' 특정 감사 결과를 보더라도, 순화 대상 문서 15,467건 중 잘못 사용된 공공 언어는 한자어(53.1%), 외국어(23.5%), 로마자 및 한자(16.7%)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도민의 생활과 밀접한 교통, 주거, 안전 관련 업무 문서의 60%가량이 순화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체할 수 있는 쉬운 우리말이 있는 단어인데도 어려운 한자어나 불필요한 외국어를 사용해왔던 것이다. 한자어로는 통보(안내, 알림), 송부(보냄), 첨부(붙임)가 대표적이고, 외국어는 홈페이지(누리집), 매뉴얼(설명서, 안내서, 지침서) 등이 꼽혔다. 로마자 AI(인공지능), DMZ(비무장지대) 등을 한글 병기 없이 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지자체 영어 구호부터 공공언어까지 이해하기 힘든 용어들

국립국어원의 2018년 ‘중앙행정기관 공공언어 진단' 보고서를 보면, 해당 분야 전문가가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이 즐비했다. 외국어 남용 사례는 더욱 광범위했는데, 교육부만 놓고 보더라도 매뉴얼, 링크 서비스, 시뮬레이터, 마이스터고, 마이크임팩트스퀘어, 스포테인먼트 등 91개 외래어가 목록에 올랐다. 한글 정책의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도 북트레일러, 커뮤니케이터, 슬로건, 엔트리, 러닝 타깃 등 82개 외래어를 지적받았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발광다이오드 등 산업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111개가 목록에 올랐다.

 

지자체의 구호가 영어로 된 사례도 많았다. 공주시의 ‘Hi-touch Gongju', 당진시의 ‘Energetic Dangjin', 보령시의 ‘VIVA Boryeong', 논산시의 ‘YESMIN', 부여군의 ‘Tradition BUYEO' 등이다. 정작 지역 주민들은 60% 이상이 구호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답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문체부는 2020년 8월에 외국어 신어(새로 만들어져 사용되는 단어)와 관련된 국민 언어 수용도를 조사한 바 있다. 535개의 외국어 낱말을 놓고 의견을 물었는데, 평균 56.4%가 우리말로 바꿔 사용하는 것에 동의했다. 동의율이 높은 단어들을 보면 타운홀미팅, 웨비나, 크래시 헬멧, 프라임 레이트, 유니크 베뉴 등 생소한 경우가 많았다.

 

 

공공기관의 외국어·외래어 남용이 왜 문제인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현재 다수 공공기관에서는 공공언어에서 외국어·외래어가 남용되고 있다. 문제는 공공기관의 외국어·외래어 남용 시 경제적 낭비가 발생할 뿐 아니라 국민들의 정책 이해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CBS노컷뉴스 인터뷰에 따르면,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이금영 교수는 "공공기관의 문서는 모든 국민이 명시적으로 이해하기 쉽고 명확한 용어를 사용해야 하지만 외래어는 그렇지 않은 편”이라며 "그 용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맥락으로 추정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정확한 의미 파악이 어려워지고 결국 소통 문제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이어 "공공기관과 언론에서 외래어를 남용하면 일반 사람들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공적 기관이 앞장서서 순화어를 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언어는 ‘인권’의 한 요소라고 말하며, “말은 의사소통 수단이지만 공적 정보를 다루는 말은 공공언어”라며 “국민의 온갖 권리와 의무, 건강과 생명, 재산권과 행복 추구에 대한 다양한 기회, 그걸 어떻게 분배받을 수 있는 건지 등이 공공언어에 다 표현된다”라고 했다. 공공언어가 어려우면 의사소통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국민이 권리를 제대로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공언어를 개선하면 경제적 효과가 수천억이라고?

공공언어의 개선은 경제적 가치로도 이어진다. 국어문화원연합회가 현대경제연구원에 의뢰한 ‘2021년 공공언어 개선의 정책효과 조사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어려운 공공언어 개선의 공익적 가치를 화폐 단위로 추정한 결과 연간 3,375억 원의 경제적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경제연구원의 분석을 보면 민원 서식 개선을 통한 시간과 비용 절감은 연간 약 1,952억 원(일반 국민 1,248억 원, 공무원 704억 원)에 이른다. 정책 용어와 약관 및 계약서는 각각 약 753억 원, 약 791억 원으로 산출됐다. 이 외에도 시간 비용과 정부 업무 효율성 약 621억 원, 정보습득 표준화 약 542억 원 등 공익적 가치 비용의 낭비를 방지할 수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어려운 공공언어로 인한) 모든 어려움이나 불편함은 쉬운 우리말을 사용했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불필요한 사회적 낭비”라며 "순화어에 대한 일반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개인의 가치 판단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순화어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보다는 공공언어 개선 활동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지적했다.

 

공공언어에 외국어를 남용한다면 그 불편은 공공기관의 서비스를 받는 국민에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공공기관에서 정책 또는 업무를 효과적으로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알기 쉬운 용어를 개발, 보급하고 정확한 문장을 사용하도록 장려한다면 지금부터라도 큰 경제적 손실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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