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고 한다. 사람 하나가 빠지면 그만큼 빈자리가 크게 다가온다는 속담이다. 말은 그 반대다. 든 자리는 표가 나도 난 자리는 모른다. 정부 당국자들이 외국어를 남용하면 저래도 되나 싶다가도 그걸 사용하지 않으면 평소에 외국어를 남용하는지 어떤지 눈치채기 어렵다.
코로나 사태가 터진 뒤 온갖 외국어가 등장했다. 코호트 격리, 팬데믹, 에피데믹, 엔데믹, 글로브 월, 드라이브 스루, 워킹 스루, 부스터샷, 트래블 버블, 포스트 코로나, 위드 코로나, 롱코비드…. 마치 국민 외국어 교육시키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거기에 평소 공무원들이 입버릇처럼 사용하는 외국어 용어까지 가세해 사태 파악을 어렵게 만들곤 했다.
지난해 10월 중순 단계적 일상회복 지원위원회에서는 ‘단계적 일상회복 로드맵’을 제시하겠노라고 밝혔다. 그 얼마 전에 정부 관계자는 언론 등에서 수없이 사용하던 ‘위드 코로나’라는 말이 코로나와 함께 살아도 별문제 없다는 인상을 줘 방역에 혼란을 부를 위험이 있다고 보고 이를 ‘단계적 일상회복’으로 사용해 달라고 당부했었다. 뜻이 모호하거나 국민이 잘 알아듣기 어려운 외국어 용어가 정책 집행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이전의 경험에서 배운 결과였으리라. 그런데 그러고 나서 2주도 지나지 않아 ‘로드맵’이라는 용어를 덜컥 사용한 것이다.
로드맵은 당국자들이 즐겨 쓰는 외국어 단어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말일 게다. 이런 말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면, “아니, 로드맵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라고 반문하는 공무원도 있다. 하지만 2020년 한글문화연대 조사에 따르면 로드맵이 무슨 뜻인지 아는 국민은 54%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 절반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70대 이상의 국민 가운데에서는 겨우 14%만이 이 말의 뜻을 안다고 답했다.
한글문화연대에서 부랴부랴 문제점을 지적한 덕에 정부는 로드맵 대신 ‘이행 계획’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물론 국민은 그런 소동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으리라.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안철수 위원장이 이런 사정을 모른 채 지난 4월 말 ‘코로나19 비상대응 100일 로드맵’을 발표했다. 사라졌던 로드맵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게다가 세부 실천 과제명과 설명에 ‘거버넌스’ ‘패스트트랙’ ‘롱코비드’ 등 다른 외국어 용어도 많이 사용했다. 이 밖에도 인프라(기반시설), 어젠다(의제), 가이드라인(지침) 등 우리말로 써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말을 굳이 외국어 용어로 표현했다. 이 중 거버넌스는 국민 이해도 조사에서도 단지 15%만이 뜻을 안다고 답한 말이다. 내 느낌엔 이조차도 좀 부풀려진 수치다.
어려운 외국어를 사용하면 국민이 용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답답해할 수 있다. 코로나 방역 대책은 국민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에 새로운 코로나 대응 체계를 정확하게 알리기 위해서는 국민이 알아듣기 쉬운 용어를 써야 한다. 특히 고위험군에 속하는 고령층이 어려운 외국어 용어 때문에 코로나 정보에서 소외돼선 안 된다. 이는 ‘코로나19 비상대응 100일 로드맵’의 실천 과제인 ‘고위험계층 보호’ 목표와도 어긋난다.
개인의 사적인 어휘 구사를 따지는 게 아니다. 공공 영역에서 외국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외국어는 소외감을 넘어 모욕감을 주기까지 한다. 공문서는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는 국어기본법 원칙을 잘 몰라서 그랬는지 110대 국정과제에도 ‘AI’ ‘R&D’ 등 로마자가 그대로 들어가 버렸다. 새 정부에서 명심해주길 바라건대, 언어는 인권이다.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공공언어에서 쉬운 우리말을 쓰길 기대한다.
이 글은 국민일보 <청사초롱>란에도 연재하였습니다.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44694&code=11171362&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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