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에서 평일 저녁에 방송하는 연속극 ‘국가대표 와이프’에서는 아주 낯선 호칭이 등장한다. 방수건설 사옥의 주차관리인 영감 방배수가 건물 청소를 하는 나여사(나선덕)와 황혼 연애를 하게 되면서 자기 이름을 ‘브레드’라고 알려주는 바람에 나여사는 그를 브레드라고 부른다. 본명을 말하면 자기가 방수건설 회장 방배수임이 들통날까 봐 그리한 것이었다. 브레드는 방배수의 ‘방’을 된소리 ‘빵’으로 바꾼 뒤 영어 단어인 ‘bread’로 돌린 말.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가 떠올라서 전혀 이상하게 느끼지 않은 사람도 있었으리라.
문제는 한국 사람이 이렇듯 외국 사람처럼 별명을 짓고 그렇게 부르는 문화가 어떠냐는 것. 그런데 이는 이미 일부 기업에서 새로운 호칭 문화로 강제되고 있다. 알려진 기업 가운데 이를 가장 먼저 시행한 곳은 카카오였고, 네이버와 카카오의 경쟁을 다룬 어느 연속극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소개되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기업에 이런 문화가 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에는 어떤 은행에서도 외국어 별명을 지어 부르게 했다고 들었다.
사람 이름을 본명대로 마구 부르는 것이 예전부터 우리에게는 꽤나 꺼림칙한 일이었단다. 그래서 옛날에는 호를 지어 부르는 문화가 양반들 주류 문화였다. 근대화 이후에 이런 풍속은 점차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대신한 게 직업, 직위, 직급 등을 부르는 문화다. 교수님, 변호사님, 박사님, 부장님, 과장님…. 일정한 직업이나 직위가 없는 사람과 직업으로 인정되지 않는 주부 등을 부를 때에는 김양, 이씨, 박 여사, 길동 엄마 식이었고.
직업·직위 등을 호칭으로 사용하는 문화에는 서열 의식이 매우 강하게 배어 있다. 변변한 호칭이 없는 사람은 결국 내놓을 명함이 마땅치 않은, 즉 자기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기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사회관계의 불평등함이 호칭에 그대로 반영되고, 이것은 권위주의와 차별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사랑만 믿고 황혼 결혼을 한 나여사는 방배수를 회장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계속 브레드라고 부른다. 여느 드라마와는 다른 호칭이다. 처음엔 좀 낯설었지만 이 호칭을 듣고 있노라면 둘의 관계가 서열로 굳어지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든다.
호칭에서 서열 의식을 누그러뜨리는 방안에는 별명을 부르는 방법 말고도 모두가 동등하게 이름 뒤에 ‘님’과 같은 꼬리를 붙이는 방법도 있다. 씨제이(CJ)를 포함해 수많은 기업에서 이제는 성이나 이름 뒤에 직위를 붙여 서로를 부르던 문화를 버리고 이름 뒤에 ‘님’만 붙여 부르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선생님’이나 그 줄임말인 ‘샘’을 붙이는 방법도 일반인들 사이에 제법 퍼져 있다.
생각해 보자. 한국에 산다고 꼭 토박이말이나 한자어로 이름을 지어야 하는가? 요즘 많이 기르는 반려동물들의 이름에 한자어 형식의 이름은 거의 없다. 개와 고양이 이름에 토박이말도 많지만 외국어가 더 많은 것 같으니, 한국인 별명을 외국어로 짓는 것은 하나의 보편적 흐름일 수도 있겠다. 다만 외국어 별명은 외국어 남용을 끌고 올 위험이 크다. 마이클, 브레드, 낸시로 부르다 보면 기업 용어에서 지금보다 훨씬 많은 외국어가 자연스레 쓰일 터이고, 이는 정부 공무원과 언론을 통해 일반 국민에게도 그대로 쓰일 수 있다. ‘거버넌스, 메타버스, 인센티브, NFT, OTT’ 따위로 말이다.
그런데 그런 용어는 외국어 약자들에게 절망을 안기고 모욕감을 준다. 외국어 능력 떨어지는 사람은 세상 물정에 신경 끄라는 신호 같아서. 어떤 시민단체에서는 외국어 별명이 아니라 우리말 별명을 만들어 부른다고 한다. 동호회에서도 널리 퍼진 문화인데, 내가 보기엔 창의성 측면에서도 우리말 별명을 지어 부르는 게 훨씬 바람직하다.
이 글은 국민일보 <청사초롱>란에도 연재하였습니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35963&code=11171362&cp=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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