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사회에서 언어 순화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언어자유주의자 지식인들의 생각과 달리 말은 바뀌고 있다. ‘네티즌’이 ‘누리꾼’으로 바뀌는 추세는 매우 확고해졌고, 최근에는 ‘홈페이지, 웹사이트’가 ‘누리집’으로 바뀌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리집’이라고 말하면서 그 주소를 알려주려면 나도 약간 손끝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느 방송이든 코로나 예방접종 예약을 하거나 정보를 확인하려면 ‘코로나19 예방접종 누리집’으로 가라고 안내한다. 소상공인 방역지원금을 신청할 때도 “안내 문자를 받은 소상공인은 전용 누리집인 ‘소상공인방역지원금’에서 신청할 수 있다.”고 방송마다 말한다.
내 기억으로 네티즌이 누리꾼으로 바뀌는 데에는 아나운서 한 분의 선도적인 실천이 큰 몫을 하였는데, 누리집은 사정이 좀 다르다. 어느 방송에서나 기자들이 다 그렇게 안내하고 있다. 이 기자들이 뭔가 결탁이라도 했을까? 그럴 리 없다. 이들이 참고하고 있는 정부 보도자료에서 ‘누리집’이라고 안내하고 있어서 기자들도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보도자료를 작성한 정부 관계자들은 왜 누리집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을까? 우리나라 초등 교과서에 ‘누리집’이라는 말이 실려 있어서 그러할까?
그냥은 고쳐지지 않는다. 역시 사람의 외침과 실천이 세상을 바꾸는 법이다. 우리 한글문화연대에서 운영하는 ‘쉬운 우리말을 쓰자’ 누리집에서는 정부의 외국어 남용 때문에 불편해하는 국민의 제보를 받고 있다. 거기에 정부 부처 및 지자체가 사용하는 ‘홈페이지’와 ‘웹사이트’라는 말을 고쳐 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그에 따라 한글문화연대에서 해당 기관에 바꿔 달라는 공문을 끈질기게 보냈다. 생각보다 요청이 잘 먹혔다.
2020년 10월에 전남도청, 2021년 3월에 여성가족부와 문화재청, 통계청, 기상청, 법제처, 강원도교육청, 산업통상자원부, 인천광역시, 한국어촌어항공단, 감사원, 경기도교육청, 2021년 8월에 행정안전부 정부24, 2021년 10월에 질병관리청, 한국교육학술정보원, 12월에 정읍시 등 16곳의 공공기관에서 ‘누리집’으로 고쳤다는 답을 보내왔다.
그렇게 바뀐 곳들이 이제 어울림 효과를 내고 있다. 여기저기서 누리집이라는 말을 쓰니까 그런 개선 권고를 받지 않은 곳에서도 자진하여 누리집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따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국토교통부의 국어책임관 한 분의 노력으로 국토부의 모든 보도자료에서는 홈페이지 대신 누리집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대세가 형성되니 그 뒤로는 가속도가 붙는다.
고쳐지지 않는다고 팔짱 낀 채 평론하는 지식인이야 고쳐보자고 말하지 않으니 고쳐지지 않을 테지만, 바꿔 달라고 딱 집어서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둘 바꾸는 곳이 나온다. 대체로 외국말 가져다 그대로 쓰는 일은 지식인들이 벌이는 일이라 그런지 신종 외국말이 책임감 없는 지식인들 위주로 너무나 빠르게 퍼진다. 그들이 언론의 말길을 장악하고 공무원의 입을 장악해버린다. 부스터 샷, 위드 코로나 다 마찬가지다. 그런 외국어 사용하지 말자고 한글문화연대에서 말리거나 비판하면 ‘쓸데없는 짓’이라고 비아냥댄다. 자기는 바꾸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는 거겠지. 바꾸지 않는 일은 뭘 하는 게 아니므로 쉽다. 바꾸는 일은 뭔가를 권하고 밀당하는 일이라 쉽지 않다.
(* 여기서 ‘지식인’이라 함은 교수, 박사급 정도는 되는 사람들이니, 그저 신종 외국말 따라 한다고 지식인인 줄 착각하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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