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시민을 ‘볼모’ 삼아 자기주장을 알리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장애인 이동권 등을 내걸고 벌이는 지하철 승차 시위에 쏟아붓는 비난 가운데 한 번 생각해 볼 문제 제기다. 시위로 지하철이 계속 연착되면 그 노선을 이용하는 승객은 꼼짝없이 지각하게 된다. 무슨 까닭으로 아무 잘못도 없는 불특정 시민들이 이런 ‘피해’를 보아야 하는가.
그런데 그 승객은 왜 하필 그 지하철을 타야 하는 지역에 살고 있을까. 사무실과 가까운 곳에 집을 장만해 운동 삼아 걸어 다니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승용차를 몰고 다녀도 될 일이다. 돈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은 변명에 불과하다. 열심히 노력해 돈을 벌었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열심히 눈치를 봐서 돈 많은 집에 태어났어야 했다. 왜 그 승객은 노력도 하지 않았고 재수도 없는가 말이다.
물론 궤변이다. 너의 부족함은 너의 책임인데 왜 난리를 피우냐는. 우리가 이런 궤변의 논리 그대로 장애인 승차 시위에 못마땅해하는 건 아닐까. 난 ‘책임’의 문제를 짚어보고 싶다. 평소 장애 문제에 온정적인 사람들조차 장애의 책임이 장애인 본인이나 그 가족에게 있다고 손톱만치라도 생각하는 한, 이런 짜증 나는 상황에서는 비난의 화살을 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시각장애인이다. 걷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혼자 걷기엔 어려움과 위험이 많다. 아예 걷지 못하는 분들과 비교하면 내 형편이 더 낫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도토리 키재기일 거다. 치매가 있는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할라치면 어머니는 자주 그런 말씀을 꺼낸다. “어쩌다 니 눈이 그렇게 됐을까….” 앞을 못 보는 내가 안타깝겠지만, 나는 방금 했던 말을 몇 번이고 또 하는 어머니의 치매가 안타깝다. 어머니는 자식을 눈이 나쁘게 낳고 싶었을까. 결코 그럴 리 없다. 난 몇 번이고 어머니 책임이 아니라고 말해드린다.
책임은 원인에 대한 책임과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 장애를 입은 원인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장애 때문에 겪는 불편한 결과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두 가지 책임이 다른데 우리는 뒤섞어 생각하는 것 같다. 원인에 대한 책임이 장애인에게 없는데 고통스러운 결과에 대해 본인에게 책임을 지라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마치 가난한 집에 태어난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게 아닌데 그 가난을 운명으로 알고 고통스레 살라는 말과 같다. 각자 다 알아서 살아야 한다면 이곳은 밀림이지 사회가 아니다.
난 가까운 관악산에도 가고 싶고 지리산 종주도 하고 싶지만 위험해서 가지 못한다. 그런데 내 실질적 위험은 두 삼거리가 ‘H’자로 이어지는 바람에 신호를 아예 꺼버린 집 앞 건널목이다. 여기엔 보행자 작동 신호기도 없다. 구청에서 경찰서로, 경찰청으로, 다시 구청으로 전화 뺑뺑이를 돌았지만 해결하지 못했다. 신호등을 켜면 교통 체증이 장난 아니라서 찬성 반대가 반반이란다.
이런 문제를 머릿수로 판단하려는 사회, 교통 체증 대신 교통 약자의 위험을 선택하는 사회가 과연 문명사회일까. 이 상황에서 나는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다. 신호등 가동에 반대하는, 그래서 나에게 뜻밖의 피해를 주고 있는 그 시민들일까. 그들은 어떤 책임도 질 수 없는데 말이다. 아니면 내 운명을 원망해야 할까.
장애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정치가 맡아야 한다. 시민들이 원망해야 할 상대는 아무런 해결책도 낼 수 없고 그저 외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장애인이 아니라 그런 문제를 사회적으로 조정하고 해결하라며 시민들이 책임을 맡긴 정치인들이다. 누가 시민을 볼모로 잡고 있는가. 지금은 정치가 시민을 볼모로 잡고 장애인들을 구박하는 꼴이다.
이 글은 국민일보 <청사초롱>란에도 연재하였습니다.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53579&code=11171362&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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