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확행. 여러 번 들었음에도 주의 깊게 듣지 않아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말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해보지 않은 음식을 만들어 가족의 품평을 들어가며 함께 저녁을 먹는 풍경이라면 코로나 시국이든 아니든 ‘소확행’이라고 할 만하다. 바쁜 일상에서 짬을 내 눈이 더 나빠지기 전에 젊은 날부터 배우고 싶었던 피아노를 배울 수 있다면 이건 내게 ‘소확행’임에 분명하다. 처음엔 너무 낯설어서 당혹스럽더라도 줄임말의 뜻과 용법에 익숙해진다면 마치 하나의 새로운 어휘를 얻는 기분이 들 수 있다. 줄임말은 이런 강점이 있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직접 사용해 보고 싶어진다. 그런 충동을 느끼게 만드는 말들은 생명력이 긴 법이니, 밀당, 꿀잼, 가성비 같은 새 줄임말들이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우리의 말 줄이기는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전경련’으로 줄이는 식의 한자어 위주 문화였는데, 21세기 들어서는 일상의 토박이말에서도 과감하게 어근만 떼어내거나 앞대가리 말만 떼어내 말을 줄여가는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 즐감, 내로남불 등이 그런 사례이다. 새로운 느낌이나 문화, 사회 현상, 개념, 기술, 이론 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말이 필요한데, 완전히 낯선 새말보다는 기존의 말을 묶어 복합적인 의미를 표현하는 방법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말들은 길어지기 쉬우니 앞머리만 끌어내어 줄이는 게 가장 초보적인 새말 만들기 방법일 터이다. 달리기를 하며 거리의 쓰레기를 줍는 일이라는 뜻의 ‘플로깅’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쓰레기 주워 담으며 달리기’로, 이걸 줄여서 ‘쓰담 달리기’로 줄인 것이 하나의 사례이다. 외국어 사용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간단하게 ‘줍다+조깅’의 방식으로 ‘줍깅’을 쓰기도 한다. ‘쓰담 달리기’도 ‘쓰담달’로 더 줄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말 줄이기는 경제성이라는 명분, 아니 실리가 작동하여 벌어진다. 지면에 길게 쓸 공간이 없으니 줄인다, 말을 길게 할 시간 여유가 없으니 줄인다, 길게 말하고 쓰려면 힘이 드니 줄인다, 생각의 진행에서 방해받지 않으려면 덕지덕지 늘어지는 말보다는 날씬한 말이 편하니 줄인다, 문자 위주의 대화 환경이 득세하니 길게 쓰기 힘들어서 줄인다. 모두 납득할 만한 사연이다. 물론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거나 그 줄임말을 접해보지 못했던 다른 동네 사람들이 처음에 당황하고 대화에서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 오해와 혼란이 생길 수 있기에 이런 줄임말은 공식적인 문화로 자리 잡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특히 국민의 안전과 재산, 권리와 의무, 기회와 행복을 다루는 공공언어에서는 매우 신중하게 도입해야 한다.
우리말 줄임말이 비교적 생활문화 속 유행에 따른 일상어가 많다면, 로마자 줄임말은 사태가 좀 다르다. 요즘 텔레비전 뉴스에 자주 들리는 말이 오티티(OTT)이다. 넷플릭스와 드라마 ‘오징어 게임’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았다. 전통적인 텔레비전 송출―방영권 계약―타국과 타 지역 텔레비전 가입자에 대한 제한적 송출 등 과거의 드라마 유통 수출입 방식과는 다른 인터넷을 이용한 전 세계적 송출을 뜻하는 말처럼 들리긴 했다. 그런데 이놈의 말이 도무지 추정이 쉽지 않았다. ‘on the ...’에 ‘tv, table, target, tablet ?’ 아무리 생각해도 뜻과 구성이 닿지 않는 말이었다. 정답은 ‘over the top’이란다. 이때의 ‘top’은 셋톱(settop)의 톱에서 따온 것이란다. 아마도 셋톱 장치를 통해 제공하는 것으로 한정된 서비스를 넘어선다는 뜻인가 보다.
외국어를 철자 대가리만 떼어내서 짧은 용어처럼 줄여 쓰거나 부르는 방법은 이미 외국에서 많이 써왔다. 기업 이름으로서는 IBM이 낯익고, 국제기구로는 UN, OECD, WTO, WHO가 매우 낯익으며, IMF, FDA, NASA와 같은 기관들도 그렇다. 이런 조직 이름 말고는 주로 정보통신 분야에서 새로 등장하는 기술과 현상 이름에 로마자 줄임말을 가장 많이 쓴다. 새로운 기술과 영역과 흐름의 융복합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SW, HW, PC, DOS, TFT LCD, TCP/IP, HTML, SNS, AI, VR, AR 등 셀 수도 없이 많다. 물론 정보통신 분야의 문제만은 아니다. 업무 관련한 활동을 가리키는 말 가운데에도 로마자 줄임말이 제법 쓰인다. 연구개발을 뜻하는 R&D, 전담 조직을 뜻하는 TF, 업무협약을 뜻하는 MOU 등이 대표적인 말이다. 사업 분야에서 자주 거론되는 지식 재산권은 IP, 기업 투자설명회는 IR, 창업투자사는 VC로 부른다.
언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중앙정부와 지자체 공무원들이 보도자료 등의 공문서에서 이런 말들을 우리말로 바꾸어 적지 않고 로마자 그대로 적어버리면 사실은 실정법인 국어기본법 제14조 제1항을 위반하는 일이다. 법 조항은 “공공기관 등은 공문서 등을 일반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으로 써야 하며,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라고 정하였다. 여기서 ‘한글’이라는 문자로 작성하여야 한다는 뜻은 로마자나 한자로 적지 말라는 말이다. 논란의 여지가 없이 분명한 규정이다. 물론 법에서는 예외를 생각하여 꼭 필요한 경우엔 괄호 속에 한자나 외국 글자를 병기할 수 있게 허용한다. 그러니 괄호 속에 적지 않고 본문에 그냥 적은 로마자는 국어기본법 위반 요소인 것이다.
공무원들이 작성한 보도자료에서 한자나 외국 글자를 본문에 그대로 쓰면 언론에서도 그대로 나가기 쉽다. 특히나 신문의 제목 공간과 텔레비전의 자막 공간은 좁기 때문에 로마자 줄임말 좀 쓰면 어떠냐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문자 사용은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로, 앞의 오티티 사례에서 보았듯이 로마자 줄임말만으로는 전체 뜻 구성을 추정하기 어렵다. 비슷하게 모호하여 답답한 사례가 ‘ASF’라는 줄임말인데, 이건 아프리카돼지열병을 가리킨다. 신문 제목에서 자주 보는 이 말을 일반 국민 97%가 어렵거나 전혀 모르겠다고 한다. 2021년에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티앤오 코리아의 조사에 따르면 일반 국민의 27.7%는 ASF를 전혀 모른다고 했고, 70%는 어렵다고 응답했다.
둘째로, 철자는 동일한데 원어가 다른 말들이 계속 생겨난다. 대표적인 예로, ‘AI’는 인공 지능(Artificial Intelligence)과 조류 인플루엔자(Avian Influenza), ‘IP’는 지식 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과 인터넷 접속 주소(Internet Protocol), ‘IC’는 나들목(Interchange)과 구동칩(Integrated Circuit), ‘PM’은 개인형 이동장치(Personal Mobility)와 사업 관리자(Project Manager) 따위로 헷갈리는 경우가 생긴다.
로마자 줄임말을 정부 공무원들과 언론에서 자주 사용하다 보면 우리말에서든 외국어에서든 줄임말 사용 경향이 지나치게 강해질 위험이 있다. 이는 공공 차원의 소통에는 분명히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말로 바꿀 수 있는 말은 모두 우리말로 바꾸어 한글로 적도록 애써야 소통이 편해진다. 우리말로 번역해서 적기에 너무 길다면 우리말 줄이는 방식으로 과감하게 줄이는 게 그나마 로마자 줄임말보다는 의미를 추정하기에 쉽다. 예를 들어 ‘OECD’를 ‘경제협력개발기구’로 바꾸어 쓰는 게 너무 길다고 느낀다면 ‘경협기구’로 줄이라는 제안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에도 너무 길거나 말 만들기 쉽지 않다면 음을 따서 한글로 적는 방법이라도 써야 한다. 예를 들어 ‘UNESCO’는 ‘유엔교육과학문화위원회’인데, 줄이기도 마땅치 않으니 이럴 때는 로마자로 적지 말고 한글로 ‘유네스코’라고 적으라는 것이다. 공무원과 언론에서 일반 국민에게 암호와의 전쟁을 강요할 까닭이 없다.
이 글은 한국어문기자협회 소식지인 <말과 글>에 기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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