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9기 권나현 기자
영화 평론가는 영화를 감상하고 나면 별점과 함께 ‘한 줄 평’을 남긴다. 한 줄 평이란 영화에 대한 평론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지난 2019년 흥행에 성공한 영화 <기생충>에 한 평론가가 남긴 한 줄 평이 논란이 된 바 있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도 처연한 계급 우화”. 국내 영화 평론가 중에서 인지도가 가장 높은 이동진 영화 평론가가 남긴 한 줄 평이다. ‘명징’, ‘직조’, ‘신랄’, ‘처연’ 등, 어려운 한자어가 가득한 그의 한 줄 평은 많은 누리꾼의 지적과 옹호를 동시에 받았다. “어려운 말만 골라 쓰면서 허세를 부린 것 같다.”, “어미 빼고 전부 한자어다.”라고 비난하는 의견이 있는 한편, “이 한 줄 평이 왜? 다들 지적 수준이 낮네.”, “이 단어를 모르다니 무식하다.” 등의 의견도 있었다.
이동진 평론가의 한 줄 평 논란은 이른바 ‘명징 사태’라는 별칭까지 붙여져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이 한자어를 모르면 무식하다고 치부하는 사람들과 생소한 한자어 사용을 대중 기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팽팽히 대립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어려운 한자어를 많이 쓰면 좋은 걸까? 그렇지 않다면, 어려운 한자어를 쓰면 무조건 잘못된 걸까?
이동진 평론가는 그의 평론에 대해, 영화에 대한 감상을 한 줄로 압축해야 하는 만큼 의미가 축약된 한자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 단어만이 나타낼 수 있는 특정한 의미가 있어 대체 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그는 영화를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를 선택해 그의 주관적인 의견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이동진 평론가의 한 줄 평을 통해 그의 개성을 확인해 볼 수도, 어휘력을 더욱 확장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동진 평론가가 그의 한 줄 평에 어려운 한자어를 쓴 사실이 문제는 아니라 생각한다. 어려운 한자어 사용을 사이에 두고 무조건 옹호나 거부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이 문제다.
요즘 10대, 20대 젊은 층의 어휘력이 부족하단 지적이 종종 제기된다. 그도 그럴 것이,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사흘을 4일로 잘못 이해해 문제가 생기는 등 어휘력이 부족해 벌어진 황당한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는 뜻의 ‘심심(甚深)한’을 한 누리꾼이 지루하다는 뜻으로 오해해 불만을 드러낸 댓글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생활에 흔히 쓰는 기본적인 어휘조차 잘 알지 못하는 건 심각한 문제이다. 단순히 개인의 언어 능력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소통하거나 사회적인 과제를 이해할 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르는 어휘를 맞닥뜨렸을 땐 이를 적대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의미를 찾아보고 알아두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다양한 어휘를 습득하면 문해력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려운 한자어 사용을 피해야 할 때가 있다. 바로 특정한 연령이나 직업, 학력, 계층 등에 관계없이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경우엔 남녀노소 어느 세대가 읽어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글을 읽는 대상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글을 쓴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다시 이동진 평론가의 한 줄 평을 살펴보자.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도 처연한 계급 우화”.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이 한 줄 평에 쓰인 한자어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명징하다(明澄하다) : [형용사] 깨끗하고 맑다.
직조하다(織造하다) : [동사] 기계나 베틀 따위로 피륙을 짜다.
신랄하다(辛辣하다) : [형용사] 사물의 분석이나 비평 따위가 매우 날카롭고 예리하다.
처연하다(凄然하다) : [형용사] 기운이 차고 쓸쓸하다.
단어의 뜻을 찾아본 후에야 이동진 평론가의 한 줄 평이 의미하는 바를 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어려운 한자어는 특정한 의미를 함축해 전달하지만, 그 뜻이 문장에서 분명히 나타나지 않으면 단번에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다양한 연령이나 계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서에서는 어려운 한자어보다 의미를 알기 쉬운 표현을 쓸 필요가 있다. 정부기관이나 자치단체가 어려운 한자어를 쉬운 우리말로 순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를 통해 국민들은 어려운 한자어라 이해하기 힘들었던 법규나 정책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동진 평론가는 영화에 대한 한 줄 평을 개인 블로그와 ‘왓챠피디아’라는 영화 추천 및 평가 서비스에 게시한다. 두 곳 모두 영화를 좋아하거나 그의 글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 그래서 이동진 평론가는 한 줄 평을 쓸 때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표현보다는 영화를 가장 잘 나타내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우선순위로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상황에 따라,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한자어 사용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쉬운 우리말을 사용함으로써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더욱 원활하게 하고, 복잡한 내용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어려운 한자어를 사용하면 수준이 높다고 판단해 이를 더 부추겨서는 안 된다. 물론 어려운 한자 표현을 무조건 적대적으로 받아들여 비난해서도 안 된다.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해 쉬워야 하는 글과 특정한 독자층을 겨냥한 글을 구분해 판단하는 것이 ‘명징 사태’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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