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지난해 한국기자협회, 방송기자연합회, 한국어문기자협회, 한글학회, 한글문화연대가 ‘우리말 약칭 제안 모임’을 꾸렸습니다. 신문과 방송에서 세계보건기구의 약칭으로 쓰고 있는 ‘WHO’ 대신 ‘보건기구’를 사용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한글문화연대가 여론조사를 한 결과 71.5%가 ‘WHO’를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코로나19 시기를 겪으면서 ‘WHO’가 언론에 많이 노출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77.6%가 ‘보건기구’로 바꿔 부르자는 제안이 적절하다고 답했습니다. 독자와 시청자 대다수가 로마자 약칭보다 우리말로 된 약칭을 원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언론의 언어는 일반 대중이 쓰는 말, 더 쉬운 말이어야 한다는 걸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언론이 여기에 얼마나 귀를 기울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공급자 시각에서 언어 문제를 보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쉬운 우리말 기자상 심사 기준은 크게 네 가지였습니다. 첫째가 외국어나 외국 문자 대신 우리말과 문자로 기사를 썼는지였습니다. ‘싱크홀’ 대신 ‘땅꺼짐’, ‘스쿨존’ 대신 ‘어린이보호구역’, ‘어닝서프라이즈’ 대신 ‘깜짝실적’ 같은 말들을 찾아 쓴 기자들이 후보에 올랐습니다. 둘째는 일관성 있게 쉬운 말을 사용했는지였습니다. 셋째는 쉬운 말을 사용하는 데 소신이 있는지였습니다. 보도자료 등 취재원의 말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언론의 언어를 사용하려고 했는지를 본 것입니다. 기대한 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이 기준에 맞는 기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습니다. 넷째는 이 외에 모범이 될 만한 부분이 있는지였습니다. 언론이 신뢰를 얻는 데 바탕이 되는 언론언어 발전에 노력한 점 등을 봤습니다.
이런 기준에 따라 선정된 신문부문 으뜸상 수상자 세계일보 이강은 기자는 쉽고 적절한 단어로 문장을 매끄럽게 구성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외국어는 쉬운 우리말로 대체하는 등 독자를 배려하고 언론언어의 격을 높이는 데 적극적이었습니다. 우리말 표현을 찾기 위해 ‘쉬운 우리말 사전’도 찾아내 애용하고 있었습니다. 출입처 관계자에게는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로 자료를 작성해 달라”는 당부도 할 정도였습니다.
방송부문 으뜸상 수상자 와이티엔 이상곤 기자는 ‘서포터즈’는 가능하면 ‘봉사단’으로, ‘AI’는 ‘인공지능’으로 바꿨습니다. 흔하게 보이는 ‘딥페이크’는 ‘불법합성물’로 바꿔서 기사를 썼습니다. 문장 또한 매끄러웠습니다. 보도자료에 보이는 외국어는 반드시 적절한 우리말로 수정해 기사를 작성하는 열의를 보였습니다. 쉬운 우리말 사용을 위해 자료 제공자에게는 ‘외국어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의견을 수시로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선거 관련 기사에서 지역주의를 심화시키는 ‘텃밭, 표밭, 아성, 성지, 누구누구 것, 본거지’, 선거를 전쟁처럼 표현한 ‘격전, 상륙작전, 난공불락, 요새, 철옹성, 혈투, 생환’ 같은 표현도 경계하는 등 언어 문화 개선에도 노력한 기자도 있었는데, 아쉽게도 수상자로 선정되지는 못했습니다.
글쓰기의 기본 원칙은 ‘쉽게 써라’입니다. 저널리즘에서도 오랜 지침이었습니다. 독립신문은 창간호 논설에서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하고,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라면서 “한글로 쓰는 것은 남녀 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요”라고 밝혔습니다. 누구나 읽을 수 있게 한글로만 적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쉬운 말로 기사를 쓰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한자와 외국어 같은 한자어투성이인 1896년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독립신문의 정신은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널리즘이 더 나아가는 길은 매일 같이 말을 다듬는 데 있습니다. ‘쉬운 우리말글 기자상’이 필요 없게 되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심사위원장 이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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