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얼굴, 민주광장 중심에 門化光이라니
세종대왕 동상 뒤로 한자 현판 ‘門化光(문화광)’을 걸어둔 건 이상하니 한글 현판으로 바꾸는 일을 논의에 부쳐보겠다고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말했다. 찬반 논란이 거세다. 이 일은 국어단체와 문화예술인들이 역대 정부에 모두 요구했었지만, 긍정적인 반응이 나온 건 처음이다. 국어단체와 유 장관 모두 <훈민정음해례본>에서 글자를 모아 짜서 한글 현판을 만들자 한다. 박정희의 글씨를 도로 달자거나 어느 개인의 글씨로 달자는 주장은 국민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는 걸 다 안다.
2020년에 한글문화연대에서 리얼미터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 한자 현판 걸자는 의견이 30%, 한글 현판 걸자는 의견은 41%, 앞쪽엔 한글 현판 걸고 뒤쪽엔 한자 현판 걸자는 의견이 20%였다. 국민 61%가 지금 한자 현판이 걸린 광화문 정면에 한글 현판을 걸자는 것이다.
문화재 관리의 기본 원칙이 원형 보존과 복원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왜 이런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숭례문이나 흥인문 현판을 한글로 바꾸자고 했으면 찬성하는 이는 10%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런 현상에 광화문을 문화유산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정서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 옛 건물은 목조 위주라 화재 위험이 매우 크다. 서구의 궁전이나 성과 달리 사무 등의 용도로 쓰기 어려우니, 볼거리로서 되도록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고 보존하는 게 맞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없애고, 1960년대에 시멘트로 복원했던 광화문 대신 나무와 돌을 사용하여 원래 있던 자리에 복원한 것은 잘한 일이다. 모양이나 건축 기법, 재료 등에서 모두 원형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문화유산으로서 가치는 높아진다. 그래서 광화문 현판에도 원형 복원 원칙이 적용되었다.
그런데, 지금 광화문에 걸려 있는 한자 현판은 조선 초 처음 지어졌을 때의 현판을 복원한 것은 아니다. 157년 전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무관 임태영이 쓴 한자 현판을 2010년에 복원했다. 그나마도 처음 복원했을 때는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만들었는데, 이게 원형과 딴판이었다. 나중에 일본에서 찾은 사진을 정밀 판독해 보니 검은 바탕에 금색 글자 같다고 하여 2023년에 그렇게 새로 만들어 걸었다.
광화문 현판의 원형을 복원하려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나는 그런 노력이 너무나도 과거에 갇혀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문화유산 원형 복원의 원칙이 광화문 현판의 문자 선택에까지 굳이 적용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 그럴까? 광화문이 그저 과거 속의 문화유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로 문화유산에 새로운 역사가 담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과거를 담은 볼거리가 되는 순간, 그 사물의 사회적 역사는 사실상 멈춰 선다. 그런데 광화문은 좀 다른 것 같다. 경복궁이라는 문화유산의 정문에 해당하니 이 또한 볼거리 문화유산임엔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광화문은 권력과 시민의 열기가 솟구쳐 나오는 현대적 광장의 중심이기도 하다. 보존되는 역사에 멈추지 않고 살아서 숨 쉬는 역사가 끊임없이 태어나는 곳이다. 경복궁이나 덕수궁, 숭례문, 흥인문과 같은 문화유산과 달리 광화문에는 두 종류의 새로운 사회적 역사가 쌓이고 있다.
먼저, 국가 상징의 역사이다. 광화문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의 얼굴이다. 그런데 이 얼굴은 사실상 과거의 얼굴일 뿐이다. 한류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지금, 한국의 얼굴인 광화문에는 중국의 문자라고 알려져 있고 한국에서는 잘 사용하지도 않는 한자로 현판을 써 걸었다. 수많은 외국인이 한자 현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역사가 쌓이고 있고, 그 모습을 보면서 찜찜해하는 국민의 마음이 새로운 역사로 덧쌓이고 있다. 독립 국가 대한민국, 식민지와 전쟁과 빈곤과 독재에서 벗어난 문화국가 대한민국의 면모는 보이지 않는다. 국가 상징의 이런 처지를 더 방치할 까닭이 있겠는가?
다음으로, 광화문은 2009년에 광장이 조성된 이래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성지가 되었다. 보수든 진보든 여기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광화문이 우리나라의 얼굴이고, 여론 형성의 상징적 중심지라고 믿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광화문 앞에는 무수한 민주주의의 역사가 쌓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주주의의 정수리에 한자는 어울리지 않는다. 한글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글자 아닌가?
나는 우리 현대사의 심대한 전환이 광화문 현판에 상징적으로 담기길 바란다. 한자로 연상되는 ‘과거, 왕정, 권위주의’ 대신 한글로 연상되는 ‘현대, 시민, 민주주의’로 문자와 시대가 옮아간 현대사의 격변이, 국민의 땀과 피와 고뇌가 아로새겨지면 좋겠다. 숭례문, 흥인문, 대한문 모두 그러자는 게 아니라 한 방울 아침 이슬처럼 오직 광화문 현판에만 한글로 딱 새겨져 돋보이길 바란다.
광화문은 외롭게 보존되는 문화유산이 아니다. 근현대 한국의 심대한 변화를 광화문에 새기자. 지금 새로 걸자는 한글 현판은 당연히 문화 원형 복원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그것은 세종 정신의 복원이고, 새로운 역사의 기록이다. 이렇게 저렇게 뒤틀리고 짓이겨진 한국의 근현대를 가로질러 도약하고 있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응축된 역사가 이제 세종의 뜻에 맞게 민주주의 문자로 수 놓이면 좋겠다. 어느 개인의 글씨가 아니라 백성 사랑의 본보기인 <훈민정음해례본>에서 글자를 모아 짠 한글 현판으로 역사적인 교체를 단행하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뜻깊은 한 걸음이겠는가?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광화문 현판은 문화유산 그 너머다 < 민들레 들판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국민들 사이에서 왜 광화문에 한글 현판을 걸자는 쪽 여론이 높은지 한글문화연대 이건범 대표가 분석하고 의견을 덧붙인 글을 썼습니다. 공감 가면 추천해 주시고 주변에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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