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랑방/아, 그 말이 그렇구나(성기지)361

한 잔의 커피 [아, 그 말이 그렇구나-353] 성기지 운영위원 어느 가수의 앨범 가운데 “비와 한 잔의 커피”라는 노래가 있다. 또 다른 가수의 앨범 가운데는 “커피 한 잔 할래요”라는 노래도 있다. ‘한 잔의 커피’와 ‘커피 한 잔’은 같은 뜻이지만 같은 말은 아니다. ‘커피 한 잔’이 우리말 표현인 데 반하여 ‘한 잔의 커피’는 우리말을 빌어 표현한 영어투 말이다. 우리는 ‘커피 한 잔’을 마셔 왔을 뿐, ‘한 잔의 커피’를 마시지는 않았다. 정육점에 가서 ‘돼지고기 한 근’을 주문하기는 해도 ‘한 근의 돼지고기’를 달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영어를 직역한 말이 우리말처럼 변해서 쓰이고 있는 언어 현실이 우리말 환경을 매우 어지럽히고 있다. 영어를 직역하는 버릇 때문에 잘못 퍼지게 된 말 가운데, ‘~로부터’라.. 2020. 9. 24.
초다짐 [아, 그 말이 그렇구나-352] 성기지 운영위원 이제 횟집에 가도 더 이상 사시미(さしみ)나 와사비(わさび) 같은 일본말은 듣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어느덧 생선회, 고추냉이가 더 자연스러워졌으며 일식집 차림표에도 그렇게 적힌다. 하지만 아직 물리치지 못한 일본말 찌꺼기가 있다. 바로 쓰키다시(つきだし)다. 횟집에 가면 주문한 생선회가 나오기 전에 여러 가지 먹거리를 내오는데 이것을 흔히 ‘쓰키다시’라 부르고 있다. 생선회를 마련하는 동안, 우선 배고픔을 면하라고 간단히 내주는 음식을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그러나 ‘고추냉이’를 찾아내어 ‘와사비’를 없앴듯이 이 말 또한 우리말로 바꿀 수 있다. 우리말 사전을 살펴보면 ‘초(初)-다짐’이 있다. “정식으로 식사를 하기 전에 요기나 입가심으로 음식을 .. 2020. 9. 17.
홀몸과 홑몸 [아, 그 말이 그렇구나-351] 성기지 운영위원 배가 불러 있는 며느리가 주방에 들어가려 하자, 시어머니가 만류하며 인자하게 타이른다. “홀몸도 아닌데 몸조심해라.”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만일 ‘임신 중이니 몸조심하라’는 뜻이라면, 낱말 선택이 잘못 되었다. ‘홀몸’은 ‘혼잣몸’ 곧 독신을 말한다. 말하자면, 배우자가 없는 사람을 홀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홀몸도 아닌데 몸조심하라’는 말은 ‘배우자가 있으니 몸조심하라’는, 전혀 엉뚱한 뜻이 되어 버린다. 임신 중인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할 시어머니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아기를 배지 않은 몸은 ‘홑몸’이라고 한다. 곧 딸린 사람이 없는 몸이 ‘홑몸’으로서, 배우자나 형제가 없는 홀몸과는 구별되는 말이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우리말로 닿소리, 홀소.. 2020. 9. 10.
동살 [아, 그 말이 그렇구나-350] 성기지 운영위원 지금은 자주 들어볼 수 없는 말이 되었지만, ‘동살’이라는 순 우리말이 있다. ‘동살’이라고 쓰고, 말할 때에는 [동쌀]이라고 소리낸다. ‘동살’[동쌀]은 “새벽에 동이 틀 때 비치는 햇살”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토박이말이다. “동살이 들기 바쁘게 거실 창 안으로 해가 비쳐 들었다.”처럼 쓸 수 있다. 이 말은 또, ‘동살 잡히다’는 관용구로 널리 쓰여 왔는데, 우리 선조들은 동이 터서 훤한 햇살이 비치기 시작하는 모습을 “동쪽 하늘에 부옇게 동살이 잡혀 오고 있다.”라고 표현해 왔다.막 먼동이 트려고 하는, 날이 밝을 무렵을 가리키는 말이 ‘새벽’이다. 그렇게 본다면, 오전 1시부터 4시 전까지는 새벽이라 할 수 없다. 요즘엔 4시가 넘어서 5시로 향할 .. 2020. 9. 2.
까치놀 [아, 그 말이 그렇구나-349] 성기지 운영위원 해질 무렵 바닷가에 앉아서 저녁놀을 감상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멀리 수평선 위에서 하얗게 번득거리는 물결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노을에 물든 이 물결을 토박이말로 까치놀이라고 한다. 먼 바다의 까치놀을 등지고 떠 있는 고기잡이배는 평화롭다. 하늘도 바다도 그리고 사람도 평화롭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평화롭지 않다. 도시의 일상에서 누려 왔던 평화는 석양을 받은 까치놀인 듯 멀리서 번득일 뿐 아무리 애써도 손에 닿지 않는다. 눈만 빼꼼히 내놓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생활한 지 8개월여. 승강기 안에서 마주치는 이웃에게도 말 한 마디 건네기가 어려운, 감염병에 유폐된 2020년. 텅 빈 가게를 지켜야 하는 자영업자에게도, 숨 한번 크게 내쉬지 .. 2020. 8. 26.
황그리다 [아, 그 말이 그렇구나-348] 성기지 운영위원 진정되어 가는 줄만 알았던 코로나19 감염증이 무서운 기세로 다시 퍼져 나가고 있다. 우려했던 대로 교회 예배와 거리 집회, 갖가지 모임 등을 통한 집단 감염이 주 요인이라고 한다. 코로나19 2차 확산에 대한 공포가 온 나라로 번져 나감에 따라 그 빌미가 되었던 몇몇 사람들은 크게 지탄 받고 있다. 우리말에 “욕될 만큼 매우 낭패를 당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낱말이 바로 ‘황그리다’라는 말이다. “코로나19 방역 체계를 황그렸으니 국민들이 분노할 만하다.”라고 사용할 수 있다. 무대에서 공연하던 배우가 큰 실수를 저지르고 “울면서 황그리는 걸음으로 무대 뒤로 뛰어 들어갔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행동이 단정하지 못하고 수선스럽고 거친 사람을 ‘왈짜’라고.. 2020. 8. 20.
어간재비 [아, 그 말이 그렇구나-347] 성기지 운영위원 실현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정부가 발표한 수도권 주택 공급 대책 가운데 층수 제한 완화가 끼여 있다. 35층까지로 규제해 오던 서울시 아파트 층수를 50층까지로 허용한다는 것이다. 한강을 따라 늘어설 50층짜리 주택들을 상상해 보았다. 그 큰 덩치에 또다시 가로막힐 팍팍한 서민들의 삶이 그려졌다. 서울을 높은 곳과 낮은 곳으로 나누게 될 고층 아파트들! 그 어간재비는 또 얼마만 한 그늘을 만들어낼 것인가! 어떤 공간을 나누기 위해 칸막이로 놓아둔 물건을 ‘어간재비’라고 한다. 집안 거실을 높은 책장으로 구분해 놓으면 그 책장이 어간재비이고, 사무실 책상들 사이를 칸막이로 막아 놓으면 그 칸막이가 어간재비이다. 때로는 특정 이념이나 종교가 사회 구성원을 나.. 2020. 8. 12.
외상말코지 [아, 그 말이 그렇구나-346] 성기지 운영위원 어릴 때 어머니 심부름 가운데 가장 하기 싫었던 것이 외상으로 물건 사오기였다. 그렇잖아도 숫기가 없었던 터라 돈도 없이 물건을 사온다는 건 엄청난 부끄러움을 감내하고 대단한 용기를 내야 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신용카드 한 장으로 얼마가 됐든(그래도 5만 원 넘는 외상엔 간이 졸아들지만) 어디서든 외상을 떳떳이 한다. 달라진 시대는 두께가 1밀리미터 남짓한 플라스틱 안에 모든 부끄러움을 감출 수 있도록 만들었다. 순 우리말에 ‘외상없다’라는 말이 있다. “조금도 틀림이 없거나 어김이 없다.”는 뜻으로 쓰이는 토박이말이다. 가령, “그 사람은 참 성실해서 무슨 일이든지 외상없이 해놓곤 한다.”라고 쓸 수 있다. 신용카드는 비록 30일 안에 물건값을.. 2020. 8. 6.
투미하다 [아, 그 말이 그렇구나-345] 성기지 운영위원 돌연히 세상을 등져 버린 서울시장의 자취 뒤에 미투(Me Too) 논란이 다시금 불붙고 있다. 비록 들온말이지만 처음부터 ‘미투하다’는 말이 낯설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 이 말을 자주 듣다 보니 언뜻 ‘투미하다’는 우리말이 떠올랐다. 어리석은데다가 둔하기까지 한 사람을 가리키는 토박이말이다. 경상도 지방에서 ‘티미하다’고 하는 말의 표준말이 ‘투미하다’이다. 억눌리고 감추어 왔던 성 관련 피해 사실을 용기 있게 알려 여론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게 미투 운동인데, 아직은 투미한 사람들이 그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 사람은 투미해서 답답하기 짝이 없다.”처럼, 상대방이 자기 말을 잘 못 알아듣고 둔하게 반응할 때에 ‘투미하다’는 말을 쓸 수.. 2020. 7. 29.